어떤 이가 광인인지 아닌지는 타인에 의해 규정된다. 적어도 두 작품에서 예브게니와 포프리신은 스스로를 광인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예브게니와 포프리신이 광인인지 아닌지는 작가 혹은 독자에 의해 결정된다.

<청동기마상>은 작가가 관찰자로서 예브게니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고, 빠라샤와의 미래를 상상하는 대목을 제외하고는 예브게니의 생각과 내면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결국 그의 행동을 목격한 작가와 독자들의 판단이 있을 뿐이다. 특히 <청동기마상>에서 선행된 작가의 판단은 독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 그의 혼란스런 머리는 끔찍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 심적 고통으로 혼이 나간 듯 했다.”라는 서술에서 보이듯 작가는 예브게니를 미치광이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독자는 예브게니를 광인이라고 판단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광인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필자는 포프리신의 광증을 곧바로 인지한 것과는 달리 예브게니의 광증은 바로 인지하지 못했는데, 깊은 절망감과 광증을 구분하기 어려웠음이 이유이다.

<광인일기> 속 포프리신은 스스로가 이야기의 서술자이다. 스스로를 스페인 왕이라고 칭한 2000년 4월 43일의 일기를 보면, 광증이 명확하게 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광증이 발현되지 않았거나, 미약한 정도에 그쳤다고 할 수 있는 하급 관리로 본인을 정체화하던 시기에 도리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적었다. “내가 어떻게 스스로를 9등 문관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그런 미치광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라는 서술에서 알 수 있다. 오히려 스스로를 스페인 왕으로 정체화하는 현재(2000년 4월 43일)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여기고 있다. 필자에게는 포프리신의 광증이 예브게니의 광증보다 명확하게 다가왔다. 러시아의 하급 관리라는 현실과 스페인의 왕이라는 망상이 터무니없을 만큼 대비가 심하게 느껴졌다.

예브게니와 포프리신은 현실과 강력한 대립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광인임을 인지할 가능성이 없다. 그들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일부 인정해야만 그들이 광증을 겪으며 보는 착란이 현실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광인이 된 그 순간부터 현실을 등지고 있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현실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거나, 스스로가 현실에 녹아들 수 없는 인간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예브게니는 자연재해로 인해 유일한 희망이었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동시에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상실했다. 절망에 잠겨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 없는 날들을 보내던 예브게니는 청동기마상을 보고 “기괴한 시선”을 던지는 동시에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공포는 청동마에 올라탄 우상이 예브게니를 뒤쫓아 오는 환영으로 발현되고, 예브게니는 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린다. 예브게니와 달리 청동마에 올라탄 표트르 대제에게는 “운명의 지배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예브게니가 “운명의 지배자”에게 보내던 “기괴한 시선”은 원망, 공포, 경외심의 여러 감정이 뒤섞여있는 것 같다. 운명을 지배한 표트르 대제와는 달리 운명에 종속된 나약한 소시민 예브게니는 운명이 정한 비극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극한의 슬픔을 마주한 한 영혼은 거대한 자연과 운명 앞에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포프리신의 내면에는 분노가 서서히 축적되어 왔다. 그는 자기애가 강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어 스스로의 상황을 객관화하지 못한다. 스스로가 9등 문관이라는 사실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그 자신이 그 어떤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서서히 축적되어 온 분노와 열등감은 타인에 대한 혐오와 경멸로 심화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망상을 창조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현실로부터 탈출한다. 그렇게 9등 문관의 과거는 뒤로 하고 스페인의 왕이 된다. 표트르 대제가 되지 못한 예브게니와 스페인의 왕이 된 포프리신의 모습이 대비된다. 정신병원에서 머리가 밀리고 몽둥이로 맞으면서도 그는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광증에 시달린다. 포프리신이 현실에서 본인의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유효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망상 속에 스스로를 가둔 점에서 소시민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망상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서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방어하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예브게니와 포프리신의 최후를 생각하다 보면, 광증이 반드시 치료되어야 하는 질병인 건지 조금은 혼란스럽다. 예브게니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이가 곁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절망감을 극복하고 광인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까. 포프리신은 오히려 광증으로 창조한 망상에 골몰해 있을 때 더 행복해 보인다. 현실에 괴로워하고 망상에 행복해하는 이를 굳이 깨워야 하는지, 그게 과연 맞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